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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에게서 배우는 참 신앙

100세 시대 조회 수 7989 추천 수 0 2011.12.13 04:43:21

출처: 주님의 영성교회

 

노인에게서 배우는 참 신앙
삿19:16-21

 

한 레위인 일행이 여행하다가 기브아에 도착했습니다. 이미 해가 저물어서 기브아에서 하룻밤을 유숙하려 합니다. 여행하는 나그네가 성읍 거리에 앉아 있으면 동네 사람들이 손님을 자기 집으로 모시는 것이 율법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브아 사람들은 아무도 레위인 일행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기브아에 가서 유숙하려고 그리고 돌이켜 들어가서 성읍 거리에 앉았으니 그를 집으로 영접하여 유숙케 하는 자가 없었더라(15).”

 

마침 한 노인이 밭에서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이들 일행을 보았습니다. 노인은 물었습니다. “그대는 어디로 가며 어디서 왔느뇨(17).” 그들은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인데 기브아 사람 중에 아무도 영접하지 않는다고 탄식하였습니다. “우리에게는 나귀들에게 먹일 짚과 보리가 있고 나와 당신의 여종과 당신의 종 우리들과 함께 한 소년이 먹을 양식과 포도주가 있어 무엇이든지 부족함이 없나이다(19).” 나그네의 딱한 사정을 알게 된 노인은 아무 조건 없이 이들을 자기 집으로 영접했습니다. “노인이 가로되 그대는 안심하라. 그대의 모든 쓸 것은 나의 담책이니 거리에서는 자기 말라 하고 그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들어가서 나귀에게 먹이니 그들이 발을 씻고 먹고 마시니라(20-21).”

 

기브아 사람들은 하나님은 섬기는 믿음의 사람이라고 하기에 부끄러운 사람들입니다. 성읍 거리에 앉은 나그네를 외면했습니다. 먹을 양식은 스스로 부담할 터이니 하룻밤만 유숙하자는 절박한 간청을 물리쳤습니다. 이런 행동은 이방인보다 못한 것입니다. 레위인 일행은 이방인들이 사는 여부스에서 유숙하려 하다가 일부러 무리해서 베냐민 지파가 사는 기브아까지 왔습니다. 기브아는 베냐민 지파의 땅입니다.

 

베냐민은 명문 지파입니다. 그러나 기대가 클수록 실망이 큰 법입니다. 기브아 사람들은 믿는다는 이름만 있었지 실상은 죽은 자와 같았습니다. 이웃에 대해 냉혹했고, 동성애와 같은 큰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날 밤에 레위인의 일행이 머문 노인의 집에 남색하는 자들이 들이 닥쳐서 손님을 내놓으라고 소란을 피웠습니다. 동성애가 만연한 소돔성 같았습니다.

 

이에 비하면 한 노인은 그 시대에 보기 드문 신앙의 사람입니다. 이웃사랑을 몸으로 실천한 사람입니다. 조상이 물려준 신앙의 유산을 잘 보존한 사람입니다. 사막에 핀 백합화와 같고, 사막에 흐르는 시내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시대에도 이와 같은 노인을 찾으십니다. 소돔성은 의인 열명이 없어서 멸망당했습니다. 기드온에게는 300명의 용사가 필요했습니다. 경건의 모양이 아니라 경건의 능력이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입니까? 제자입니까? 믿음은 아는 것이 아니라 행하는 것입니다.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행하는 것입니다. 전통은 관습이 아니라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손님을 대접하는 아름다움

노인은 아무 대가없이 레위인 일행을 자기 집으로 인도해서 대접합니다. “노인이 가로되 그대는 안심하라 그대의 모든 쓸 것은 나의 담책이니 거리에서는 자지 말라 하고 그를 데리고 자기 집에 들어가서 나귀에게 먹이니 그들이 발을 씻고 먹고 마시니라(20-21)

사랑을 받은 대로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랑이 아니었으면 애굽의 종살이를 면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면 광야 40년 동안 생존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면 일용할 양식을 얻지 못합니다. 이제 그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유목민의 생활에서 나그네 대접은 사랑의 증표입니다. 여행하는 나그네를 돌보지 않으면 곧 죽음에 내몰릴 수 있습니다. 언제 양식이나 물을 공급받을지 모릅니다. 바깥에서 자다가 어떤 일을 당할지 모릅니다. 사랑은 생명과 같습니다. 남녀간의 사랑이 그렇고, 부부간의 사랑이 그렇습니다. 사랑은 이웃과 형제를 섬기는 것입니다. 사랑은 나의 존재 방식이고, 다른 사람의 생명을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도 하나님의 사랑에 있습니다. 독생자를 보내서 구원한 것도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다. 일용할 양식을 주신 것도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참새 한 마리도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도 입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십니다.

 

잘 사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인천공항은 세계로 나가는 관문입니다. 인천 공항으로 직접 연결하는 공항 철도가 개통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상상도 못한 넓은 세상이 열렸습니다. 잘 사는 것의 척도가 무엇입니까? 물질이나 문명의 발달이 전부가 아닙니다. 양심과 도덕입니다. 적극적으로 사랑이 얼마나 넘치는가가 질적인 삶의 척도입니다. 질서와 치안을 이루는 것도 사랑입니다. 구제와 공공복지를 향상시키는 것도 사랑입니다.

 

안정되고 평안한 삶을 이루는 것도 사랑입니다. 이웃 사랑이 삶의 질의 척도입니다. 사람이 죽어도 모르는 세상은 결코 잘사는 세상이 아닙니다. 나만 배부르고 만족하다고 잘 사는 세상 아닙니다. 거지 나사로와 같이 가난과 질병으로 쓰러져 가는 이웃을 두고만 볼 수 없어서 함께 손을 잡는 것이 잘 사는 세상입니다.

 

한 남자가 차를 몰고 집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일자리를 구하기가 이렇게 어렵다니.” 어둠이 내리면서 눈발까지 날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낡은 자동차의 가속 페달을 밟아 길을 재촉했습니다.

얼핏 길모퉁이에 자동차 한 대가 서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고장이 난 모양이었습니다. 최신형 고급승용차 안에서 한 노부인이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노부인은 잔뜩 겁을 먹은 채 지쳐 있었습니다. 한 시간이 넘도록 그곳에 서 있었지만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초라한 행색의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설마 나를 헤치려는 건 아니겠지?” 노부인은 안심할 수 없었습니다.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차 밖으로 나왔습니다. “아주머니 제가 도와드리죠. 추운데 차 안게 들어가 계세요.”

자동차 타이어에 펑크가 났습니다. 차 밑으로 몇 번을 들락날락하자 옷이 더러워졌습니다. 실수로 손까지 다쳤습니다. 하지만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트렁크에서 보조 타이어를 꺼내 갈아 끼웠습니다.

노부인은 사례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정말로 고마웠습니다.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습니다. 이토록 적막한 곳에서 강도라도 만났다면 큰일 날 뻔 했습니다. 얼마나 드리면 좋을까요? 말씀만 하세요. 정말입니다.”

그는 손을 내저으며 대답했다. “저는 도움이 필요한 분을 도와드렸을 뿐입니다. 돈을 받으려고 한 일이 아닙니다. 정말로 제게 답례를 하고 싶으시면 나중에 곤경에 처한 사람을 만났을 때 그냥 지나치지 말고 도와주세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완강하게 수고비를 거절하는 바람에 노부인은 꼭 그러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노부인은 차를 계속 몰아 한참을 갔습니다. 작은 카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카페에 들어가 잠시 쉬며 허기를 채우기로 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선 카페는 허름했습니다. 여종업원이 다가와 수건을 건넸습니다. 눈에 젖은 머리를 말리라는 뜻이었다. 그 여종업원은 만삭의 임산부였습니다. 몸이 무거울 터인데 힘든 기색 하나 없이 노부인이 주문한 메뉴를 준비하러 재빠르게 움직였습니다. 그녀가 만들어준 음식은 정말 맛있었습니다.

 

노부인은 식사를 마치고 나서 백달러짜리 지폐를 건넸습니다. 그러나 시골의 작은 카페에 그런 큰 돈을 거슬러줄 돈이 있을리 만무했습니다. 종업원이 급하게 거스름돈을 마련하러 간 사이, 노부인은 슬며시 문을 나섰습니다. 만삭의 여종업원이 겨우 거스름돈을 마련해 돌아와 보니 노부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테이블 위에 메모지가 놓여 있었습니다. “거스름돈은 소중한 일에 사용하세요. 출산하는데 돈이 많이 필요할 겁니다. 저한테 고마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저도 오늘 어떤 고마운 분에게 도움을 받았답니다.”

젊은이는 직장이 없었고, 돈 많은 할머니는 고장 난 차를 고쳐줄 사람이 없었고, 카페의 종업원은 출산비가 없었습니다. 사람마다 다 부족합니다. 서로 도움이 필요합니다. 남을 대접하고 사랑할 줄 아는 것이 진정한 신앙입니다. 이런 사람이 복을 받습니다. 사도 요한은 가이오를 축복합니다. “네 영혼이 잘됨과 같이 네가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가이오가 왜 축복을 받을만한 사람입니까? 당시 순회전도자를 잘 영접했습니다. 가이오와 반대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디오드레베입니다. 그는 순회전도자를 배척하고 으뜸 되기를 좋아했습니다.

 

잘사는 집은 인심이 후합니다. 경주의 최부자집 가훈에는 사방 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 합니다. 사랑방에 늘 손님이 넘칩니다. 이것이 300년 부의 비결이었습니다. 남에게 인색하지 않고 많이 베풉니다. 이런 집이 존경받고 복을 받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아파트 문화가 손님을 대접할 수 있는 구조는 아닙니다. 그렇다고 이웃과 담을 쌓고 살아서는 안 됩니다. 교인들과 담을 쌓고 살아서 안 됩니다.

 

하나님과 관계도 중요하지만 사람의 관계도 중요합니다. 사람과의 관계가 사랑입니다. 내향적이거나 외향적이거나 표현의 차이는 있어도 사랑을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손님 대접하는 중에 소돔성으로 가는 천사를 대접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여리고로 내려가던 강도 만난 사람을 살렸습니다. 바나바는 자기 재산을 팔아서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형제들을 구제했습니다. 수넴 여인은 엘리사 선지자 일행을 대접해서 2층 다락방까지 숙소로 제공했습니다.


노동하는 아름다움

나그네를 대접하는 노인은 부자가 아닙니다. 모든 것이 있어서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대접과 사랑은 멋이나 낭만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친 노동으로 하는 것입니다. 불노소득으로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땀 흘린 수고로 하는 것입니다.

이 노인은 종일 일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그네들을 만났습니다. “이미 저물매 한 노인이 밭에서 일하다가 돌아오니(16).” 누가 일합니까? 젊은이가 아니라 노인입니다. 잠깐이 아니라 저물 때까지 일합니다. 이 노인의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나그네를 대접하는 사랑도 아름답지만, 그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노동하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노동은 신성합니다. 노동 자체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무위도식도 하루 이틀이지 견디기 힘듭니다. 중노동에 시달려도 오래 살지 못하지만, 일 안해도 오래 살지 못합니다. 알맞게 일하는 사람이 오래 삽니다. 하루를 보람 있게 사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신앙생활 잘하기 위해서 조심할 것이 둘입니다. 하나는 노동만 하다가 하나님 섬기는 것을 게을리 하는 것입니다. 일만 하다가 죽는 것은 스스로 짐승처럼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늘을 쳐다보고 살아야 합니다. 사슴은 모가지가 길지만, 사람은 하나님을 그리워하는 영혼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생의 목적은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즐거워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기 위해 조심할 것은, 하나님 섬긴다는 핑계로 노동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일하기 싫은 자는 먹지도 말라 하였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재림을 핑계하고 일하지 않다가 혹독한 책망을 받았습니다. 주님이 내일 재림하실지라도 오늘은 일해야 합니다. 어떤 이유로든 노동을 외면해서 안 됩니다. 십계명도 엿새 동안 힘써 일하라고 하십니다. 일이 곧 예배이고, 예배가 곧 일입니다. 노동이 예배만큼 귀합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직장이 없어서 일할 것이 없다고 합니다. 청년 실업이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었습니다. 대학을 나와도 자기 전공 분야에서 취직하기 어렵습니다. 이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요즘 젊은이들에게 일에 대한 열정이 없는 것입니다. 맨주먹으로 자수성가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냥 지나치면 안 됩니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이 많다고 외친 도전 정신을 잊지말아야 합니다. 오라는데 없으면 찾아가야 하고, 박봉에 고되고 힘든 일이라도 내일의 소망을 위해 일해야 합니다.

 

일찍 퇴직하는 것이 사회의 추세가 되었습니다. 한참 일할 나이에 정년을 맞거나, 명예퇴직을 해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일터를 떠납니다. 평생직장이 없어진 것도 인정합니다. 급변하는 시대에 안정된 직장이 사라지는 것도 인정합니다. 재취업이 잘 되지 않는 것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죽는 날까지 일해야 합니다. 사람은 계속해서 걸어야 살듯이, 사는 동안 일해야 삽니다. 흙으로 돌아가는 그날까지 거룩한 노동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마에 땀을 흘려는 자만이 먹을 자격이 있습니다.

 

기독교 단체에서 운영하는 평화로운 양로원이 어느 날 두 파로 갈라졌습니다. 다같이 한 교회를 섬겼는데, 어느날 목사님이 설교하시면서 사모님을 비롯해서 몇 분은 살을 빼는 것이 좋겠다고 건강을 위해 한 말씀 하셨답니다. 한 할머니가 그 말씀에 시험에 들어 교회를 떠났습니다. 여러 교회를 전전하다가 한 교회에 정착했는데, 혼자만 간 것이 아니라 할머니 몇 분을 그 교회로 인도했습니다. 평화롭던 공동체가 둘로 분열되었습니다
.
왜 이런 유치한 일이 발생합니까? 할머니도 살쪘다는 소리 들으면 시험 듭니다. 사람이라 어쩔 수 없습니다. 아무리 늙어도 늙었다거나 곧 죽을 것 같다는 말은 듣기 싫어합니다. 생각 없이 “예” 했다가는 큰일 납니다. 늙어도 생산적인 일을 못해도 허무는 일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이 양로원은 기독교 단체에서 운영하기 때문에 새벽마다 기도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나름대로 경건합니다. 외부에서 사랑의 손길도 많이 방문합니다. 고립되지도 않았습니다. 이만하면 영적으로 좋은 환경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빠진 것이 있다면 노동입니다. 아무리 좋은 양로원이라도 적당한 일이 없으면 그 빈 자리는 채울 수 없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행복하게 살려면 적당하게 일해야 합니다. 손자손녀라도 보아야 합니다. 가벼운 운동이라도 해야 합니다. 자기 손, 자기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야 몸도 마음도 건강해집니다. 활기찬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적당한 일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일하는 자가 거둡니다. 중국인들이 캐나다 로키산맥을 관통하는 철도 공사에서 많이 희생당했습니다. 그러나 그 희생이 밑거름이 되어서 후손들이 캐나다에서 자리 잡고 대접받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월남과 중동에서 피와 땀을 흘려서 번 돈으로 고속도로를 건설해서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습니다. 세계 교회사에 찾아보기 힘든 부흥을 이룬 한국교회도 일하는 교회였습니다. 전도하고, 교육하고, 선교하는데 땀을 흘렸기 때문에 부흥했습니다. 외국의 원조나 선교사만 의지했다면 오늘의 한국교회는 있지 않을 것입니다.

 

요즘은 손님처럼 대접하는 교회를 좋은 교회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좋은 시설과 프로그램과 설교가 있으니 여기 와서 은혜 받으라고 합니다. 물론 그래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좋은 교회는 생산적인 교회입니다. 소비하는 교회가 아닙니다. 받는 교회가 아니라 주는 교회입니다. 전도하고, 선교하고, 자기 은사를 따라 봉사하고 섬기는 교회입니다. 섬김을 받는 교회가 아닙니다. 좋은 교회는 교인을 결코 손님 대접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당신도 대접하라고 합니다. 소비자로 보지 않고 끊임없이 훈련하고 성장시켜서 생산자가 되게 합니다.

 

“내 일생(꿈에도)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이 찬송처럼 평생을 땀 흘리며 섬기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일할 수 없는 어두운 밤이 곧 올 것입니다. 옛날 시골 교회에서는 교사가 넉넉지 않아서 중학생만 되어도 교사로 봉사했습니다. 저희 큰 아들도 중학교 2학년부터 유치부 보조교사를 시작해서 고등학교 3학년 때도 유치부 교사로 봉사했습니다. 일을 늦게 시작하면 안 됩니다.

 

청년 때에는 세상이 재미있어서 못하고, 결혼하면 아이 양육하느라 못하고, 취직하면 성공해야 하기 때문에 못합니다. 핑계하면 안 됩니다. 자녀들 시집장가 보내고 시작하면 교회에서도 마땅히 설 자리가 없습니다. 이미 천국의 시상대는 만원입니다. 봉사도 빠를수록 좋습니다.

 

신앙생활 잘하려면 성경을 잘 알고 기도를 많이 하고 찬송을 잘해야 합니다. 성령이 충만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바로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브아의 한 노인과 같이 이웃사랑을 실천하고 땀 흘려 노동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아무리 좋은 관계를 가진다 할지라도 신앙의 기초가 든든하지 않으면 무너지고 맙니다. 나보다 어려운 이들을 대접하고 섬길 줄 알아야 하고, 자기 손으로 자기 생활을 감당하고 남을 구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그네 대접과 노동의 땀이 있으면 건강한 신자입니다. 건강한 신자가 복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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