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잔정] 샌디에고에서 느낀 것들

조회 수 3848 추천 수 0 2013.12.19 03:5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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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이다. 20여 명의 소아 정신과 전문의들이 한국에서 왔다.

태평양 바다가 눈앞에 펼쳐져 있는 미서부 남단의 도시, 샌디에고에서 개최되는 '미국 소아 및 청소년 정신과 연례 학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이다. 미전역을 통틀어서 이제 겨우 8,000명의 멤버를 갖고 있는 소아 정신과 의사의 숫자를 감안해 본다면, 점차 숫자가 늘어가는 한국 소아 정신과는 막강한 힘이다.


게다가 미국 내 많은 의사들이 은퇴기에 다가가는 것에 비해서, 이 한국 의사들이야 말로 대부분 팔팔한 젊은이들이다. 더욱 많이 배우고 조국의 어린이 환자들을 위해서 봉사할 수 있는 기간이 장장하다. 연구 논문의 발표도 차츰 활발해지고 있다.


부모, 특히 엄마와의 관계가 어린이의 성장에 미치는 영향은 아무리 강조를 하더라도 모자란다. 이런 엄마와의 깊은 관계 중에서 유전적, 심리적 요소도 아주 중요하지만, 엄마가 자랐던 배경이나 사회 환경을 무시하고서는 아이를 이해하기 힘들다. 그러니 이민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나라에서 각 나라의 문화를 이해한다는 것은 정신 건강의 이해나 치료에 절대적이다.


1994년에 제정되어 출판된 “정신병의 진단 및 통계 열람, 4권(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Illness IV)” 안에 한국인에게서만 발견되는 ‘홧병’이나 ‘신병’이 포함되어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비록 크게 보아서는 ‘우울 증세’나 ‘불안 장애’에 속하지만, 한국인들은 ‘마음의 아픔’을 ‘몸의 아픔’으로 표현하는 수가 많다. 물론 무의식적인, 민족 특유의 습관이리라.


“목 안에 불 같은 덩어리가 오르내리고, 가슴이 터져서 숨이 막힐듯하고, 오금이 저리고,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려오고, 눈앞이 캄캄하고, 입을 열어도 말소리를 낼 수 없고, 공연히 나른하고, 입맛이 없고…….” 내가 이민 1세의 한인 어른들에게서 자주 듣는 말들이다.


중국인들의 “코로(KORO”, 멕시코인들의 “네르비오스(Nervious)”, 말레시아인들에게는 “아목(AMOK)” 증상이 같은 진단 열람에 기재되어 있다. 미국에서 수련 받은 의사들은 그래서 늘 환자들의 어린 시절, 두고 온 고향에서의 영향에 귀를 기울인다. 왜냐하면 감정 조절이나 아픔을 이기는 방법들을, 우리는 아주 어린 시절에 부모님이나 형제들에게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배웠기 때문이다.


나는 가끔 찾아가는 고국에서, 이즈음 활발하게 소아 정신과에 대한 이해가 높아가는 것을 발견한다. 특히 자폐증에 대한 지식은 “마라톤” 등의 영화나, 미국 영화인 “레인맨”(Rain Man) 등을 통해서 더욱 잘 알려져 있다.


특별한 치료제가 없는 이 ‘대뇌의 병’을 앓고 있는 자녀들을 위해서 한국의 부모들은 유아학교나 놀이방을 잘 이용하고 있다. 그리고 필요하면 각성제를 써서 주의집중을 도와주고, 행동항진 증세를 조절하여 이들이 특수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돕는다. ‘자폐증’ 환자들 중에는 ‘주의산만증’의 유전인자를 공유한 사례가 많은 것을 이들은 이미 알고 있었던 듯이……. ‘자폐증’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미국 소아 정신과 분야와 보조를 맞추고 있는 셈이다.


지난 5월에 나는 한국의 장애아 학교 교사들과 부모들로부터 ‘항정신제’ 사용에 대한 강의를 부탁받았었다. 위험스럽게 공격성이 심하고, ‘조증’이나 ‘정신 증상’이 심한 이 청소년들에게 ‘항정신제’나 ‘항우울제’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며,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방편이기 때문이다. 이곳 미국에 살고 있는 이민 부모들이 “약은 절대로 쓰고 싶지 않아요!”라며 자신 없어 하는 모습과 대조적이었다.


지식이 없으면 새로운 위기를 헤쳐 나가기 힘들다. 행동장애나, 대뇌의 질환(‘주의산만증’, ‘우울증’, ‘조울증’, ‘자폐증’ 등등이 이에 속한다)은 치료가 필요한 의학적 위기 상황이다. 한국의 현대 부모들처럼 이곳 이민 1세의 부모들도 정신병을 이해하고 공부해야 한다. 그래야만 필요한 결정을 자신이나 환자인 자녀들을 위해 과감하게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몸의 병이나, 마음의 병은 기대치 않을 때에 온다. 이를 위해서 대비하고 정신과 의사들과 함께 용감한 결정을 내리는 것은 부모로서의 의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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