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노래는, 우리나라에 잘 알려진 수많은 '동요' 중에서, 가장 많은 '동시'를 남긴 '윤석중' 시긴의 찻 작품의 동요이다.
'윤석중' 시인은 일제초기부터, 36년세월과 함께, 지금까지, 8명의 대통령을 거치는 생애 <1911~2003> 92년 동안,
오직 어린이를 위한 동시를 쓰는데 일생을 바치셨다.
윤석중은, 한일합방, 그 이듬해, 1911년 서울에서 태어나, 일본, 상지대학 신문학과를 졸업하여,
<조선일보> 주간을 역임하였고, 1956년엔 '새싹회' 회장이 되어 '소파상'을 제정하는 등,
아동문학을 중심으로 한 사회사업에도 헌신하는 삶을 살았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초기동요의 대부분이 그를 거쳤다는데 '멍에'를 갖고 있다.
그의 동시가 많은 동요로 만들어지게 된 동기는, <신소년>지에 '봄'이라는 그의 동시가 실리면서,
작곡가 '홍난파'의 <고향의 봄>이나, 박태준의 <오빠생각>같은 동요가, 동시로 쓴 글이 '노래'로 탄생되었을 때,
그 위력이 엄청나다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그리하여 자신의 시를 노래로 만들고 싶어, 작곡가 '박태준'을 만났고, 마침내 그의 글이 처음 노래로 옷을 입었을 때,
그 기쁨과 감동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이 기뻣다고 했다. 그의 꺼지지않는 창작이 불붙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때였다.
'노래 없는 시는 쉽게 잊혀질 수 있는 반면에, 노래로 만들어진 동시는,
온 겨레의 마음속에 오래도록 남아있다'는 사실을, 몸소 체험한 후, 줄곧 '한 우물만을 파왔던 것이었다.
초기의 작곡가를 비롯하여 일생동안 각 시대별로 두각을 나타낸 <작곡가>들을 쉽게 사귈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그 자신이 음악에 대한 신뢰가 깊기 떄문이기도 하지만, 그의 인생행보 자체가 시와 뗄 수 없는 길이 주어졌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1933년, (어린이)지의 주간이 된 것을 비롯하여, 1936년, <조선일보사>주간을 역임하는 동안,
그의 사회적 문화적 위치가 크게 작용했던 이유라 하겠다.
당시 조선땅에 상륙한 일본상인들은, '축음기'를 비롯하여 '자전거' '안경' 등,
온갖 물건들을 들여와 <만물상>에서 팔고 있을 때였는데, 그 속에 <오뚝이>도 있었다.
'오뚝이'인형은 대부분 기모노 <일본전통의상>과 '사쿠라꽃' 무늬로 되어있고, 속은 텅 비어있었으며 공처럼 둥글었다.
바강에 던지며 '오똑 오똑'서는 종이 장난감인데, 신기하게 바라보다 흥미을 갖게 되었던' 윤석중'은,
일본은 이 오뚝이처럼 결코, 넘어지지 않는, 정신을 담고 있다며, 조선땅에서 노골적으로 일본의 우월감을 과시하려고
이 따위 물건을 팔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오히려 일본인들의 오만 방자한 행동이 역겹다는 뜻에서
'성내고, 술에 취하고, 주정하는 모습이 한마디로 '우습다'는 표현을써 그들을 이 노래로 조롱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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