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잔정] 원주의 어느 여의사 이야기

조회 수 3926 추천 수 0 2013.12.29 19:55:44

수잔 정.jpg

 

나는 강원도를 사랑한다. 의대 재학중에 무의촌 진료대로서 찾아갔던 정선인들의 순박한 마음씨가 시초였다. 그후 사랑하는 사람들과 다녀온 강릉의 경포대와 푸른 바다, 붉은 감들이 익어가는 기와집들에 마음을 빼앗기곤 하였다.

 

그러나 가장 깊은 의미를 심어준 곳은 원주였다. 그곳에서 2년간 내과 수련을 받으며, 나는 첫딸을 낳았었다. 원주 기독 병원내에 나병환자와 결핵환자 진료실이 있어서 내과 수련의인 내가 가끔 외래를 보았었다.

 

최근에 읽은 책 "리턴 투 코리아(return to Korea); 한국에로의 귀향"이라고 번역 가능한, 플로렌스 머레이라는 캐나다인 의사의 땀과 정열이 깃든 곳임을 알게 되어서 더욱 감격이 커졌다.

 

우리 민족이 일제에 항거하는 삼일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에 닥터 머레이는 케냐에 있는 의과 대학을 졸업하였다. 수련을 마친 2년후 1921년에 감리교 의료 선교사로 한국에 들어온 그녀는 함흥 지역에서 활발한 의료 봉사를 하며 국내 최초의 결핵 요양소를 세웠다. 간호 대학 설립 등의 교육 및 의료 봉사를 하던 그녀를 결국 일제에 의해서 1942넌에 강제 송환되고 말았다. 해방되기 3년 전이다.

 

그녀는 1947년에 다시 한국에 돌아와서 육이오 전쟁의 참화를 자신의 몸으로 당하면서 이북에서 내려온 난민들, 부모를 잃은 고아들, 거제도에 갇혀있던 수많은 포로들을 돌보았다. 이화 의대 병원과 세브란스 병원을 지키면서 겪은 많은 이야기들이 눈물겹게 기록되어 있다.

 

다 부서진 병원 안에서 간호사들과 똑같은 식사를 하던 어느날 그녀는 더 이상 고추장과 김치국을 넘기지 못해서 근처의 미군 부대를 방문하였단다. 도저히 서양식 음식을 마련할 방도가 없었기에.

 

이것을 알게된 과거 함흥 병원에서의 동역자가 그녀를 찾아왔었단다. 현재 150명의 고아를 돌보고 있는데 극심한 물자 부족으로 아이들에게 먹일 단백질 재료가 없어서 병이 잘생기니 군인들의 식탁에 남은 음식물을 수거해주면 잘 끓여서 아이들에게 먹일수 있도록 부탁의 말을 해달라고.

 

그 부탁 후에 장교의 알선으로 남은 음식뿐 아니라 부엌에 남아있던 신선한 재료들도 함께 제공해주어서 몇달 후 어린이들의 체중이 많이 늘었었단다. 그녀는 또한 부대안에 버려져 있는 모든 빈깡통들을 모아달라고 하였다. 자신의 운전사 아저씨 손에 들어가면 빈 깡통들이 멋진 비누곽이나 컵등으로 만들어져서 물자가 귀한 병원 살림에 도움이 되었다.

 

어느날 미군 지휘관 한명이 씩씩거리며 그녀를 찾아왔다. 한국인의 정서와 문화에 익숙치 않은 외국인들에게 그녀는 기회가 될때마다 교육을 시켜왔기 때문이다.

 

“글쎄 제가 어느 고아원에 밀가루 7포대를 기증하고서 그 다음날 가보니 창고에 한 포대도 남아있지 않으니 누구인가가 몰래 팔아먹은 것 아닐까요? 한국인 중에는 도둑이 많다던데…”

 

대답 대신에 그녀는 되물었다.

 

“당신은 밀가루를 어떻게 요리해서 드시나요?”
 
“물론 빵으로... 오븐에 구워서 먹지요”
 
“한국인 집에는 오븐도 없거니와 빵보다는 국수를 만들어 먹는 것을 좋아한답니다. 내일 다시 창고에 가보세요.”
 
그 장교가 다시 찾아간 창고에는 밀가로 만들어진 국수가 가득차 있었단다.

 

수년 후 그녀가 원주를 찾아간 이유는 간단했다. 전쟁으로 집과 일터를 잃어버린 한국인들 중에서도 높은 산에 둘러쌓인 강원도인들의 가난과 질병이 더욱 절박해 보였기 때문이다.
 
원주에 내려가지마자 시작한 의료 행위는 나환자들이 모여사는 외딴 곳을 찾아가서였다. 감염을 두려워하는 이웃들로부터의 배척 때문에 외진 곳에 모여사는 이들은 아무 치료도 받지 못한 채 결국은 건강한 가족들까지 감염시키고 있었다.

 

대부분 더운 남쪽 지방에 많이 퍼져있는 나병환자가 북쪽 지방인 원주에 산재해 있는 이유를 그녀는 나중에야 알아내었다.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특별한 비법이 있다고 선전을 하자 많은 환자들이 집과 논밭을 팔고서 원주를 찾아왔다가 다시 돌아갈 집도 없는 빈털털이 상태에서 그대로 원주에 주저 앉았기 때문이란다.

 

그녀는 지씨라는 한국인 직원과 함께 가가호호 나환자의 집을 방문하여 꼭 한 달분씩만 약을 제공하였다. 많이 주면 팔아버리는 경우가 많을 뿐더러 빨리 나으려고 한꺼번에 다량을 섭취하여 심한 부작용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닥터 머레이가 일흔 살이 될 때까지 헌신하였던 원주 기독병원은 이제 나의 모교, 세브란스의 자매 학교로 우뚝 자리 매김하고 서있다.
 
전쟁이 끝난 후 6년간 그녀가 헌신적으로 일하여 세웠던 원주 기독병원을 이제 더욱 새로운 마음으로 찾아갈 때가 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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