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잔정] 생존자들의 이야기

조회 수 3364 추천 수 0 2014.02.14 12:5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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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금 융자(loan)를 받아서 법대 공부를 하면서도 파트타임으로 온갖 일을 하던 둘째 딸, 카니가 어느 날 두툼한 책을 한 권 보내왔었다.

 

조지타운 법대를 방문한 한국계 미국인 소설가 이창래씨의 처녀작 "영원한 이방인(Native Speaker)"라는 책이었다. 저자의 사인까지 받아서 보낸 걸로 미루어 보면 무척 감동적인 만남인 듯하였다.

 

그 소설 속에는 뉴욕에서 청과물 사업을 하는 한인 이민자들의 땀과 눈물 섞인 이야기들이 담겨 있었다. 세살 때 부모님과 함께 뉴욕으로 이민왔던 저자 자신의 이야기인지도 몰랐다. 그러다가 뉴욕에서 일어난 폭동 때문에 힘없이 희생자들이 된 뉴욕 이민자들의 이야기는 훗날 LA에서 내가 두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면서도 아무 도움을 줄 수 없었던 LA폭동과 다를 바 없었다.

 

이 책으로 미국내 유수의 6개 문학상을 수상한 저자는 계속 주옥같은 작품들을 내어 놓았다.

 

그래서 "Surrendered(생존자)"라는 책이 나오자마자 구해서 읽으며 나는 많이 울었었다. 나의 어머니와 외할머니가 어린 시절에 얘기해 주셨던 나와 가족들이 겪은 육이오 사변과 일사후퇴 때의 고생들이 눈앞에 선하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 장면들이 실제로 현실에서 내가 겪은 일이었는지, 아니면 할머니의 이야기를 꿈에서 본 것인지 나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눈이 쌓인 산 언덕을 기어오르는데 저 밑에서 인민군들이 총을 쏘아대던 소리는 귀에 선하였다.

 

“엄마 이제 자고 가면 안돼?” 라고 어린 내가 엄마에게 말하면 어머니는 ‘애가 힘드나 보다!’라고 여기시며 농가를 찾아 들었단다. 그리고는 제일 먼저 버선을 벗겨서 말리셨단다. 그래야 다음날 신고 걸을 수 있을테니...

 

"생존자"의 첫 페이지는 다음의 문장으로 시작된다.

 

“아직 여행은 끝나지 않았다.”

 

바로 이 여행은 열한 살 짜리 주인공 소녀가 청주에서 부산으로 내려가는 기차의 지붕 위에 간신히 올라타고서 떠나는 피난길이었다. 여섯 명 가족 중 부모님과 언니가 전쟁 중에 처참하게 자신의 눈 앞에서 사살 된 후에 남은 일곱 살짜리 두 쌍동이 동생들이 기차 지붕에서 떨어질까 봐 광목천으로 움켜 싸안고 가는 죽음 직전의 여정말이다.

 

비록 지붕 위라도 운좋게 기차를 얻어 타기 전에는 그녀와 동생들은 타박타박 끝도 없는 길을 걸어야만 했다. 그러다가 비가 쏟아지면 농가에 뛰어 들어가 다른 삼십여 명의 피난민들과 함께 작은 방 하나에서 앉은 채로 자야 했다. 그녀의 무릎에 기댄 동생들의 머리카락 사이로 하얗게 줄을 이어 움직이는 이(lice)들을 그녀는 참빗으로 훑어내주곤 하였다.

 

이 책의 농가 장면을 읽으면서 나는 문득 어느 논둑길이 떠올랐다. 충청도 공주라는 도시에 우리 가족 같은 피난민들을 수용하는 곳이 있었다. 그 당시 나의 어머니는 두 분의 노쇠한 할머니들과 나, 그리고 두 살 밑의 동생, 인숙을 데리고 힘든 길을 걸어 오신 후였다.

 

이런 힘든 시간에 나의 아버지는 한번도 기억 속에 없다. 미리 다른 직장 어른들과 함께 자동차로, 아니면 배로 피난을 했다는 어머니의 설명뿐이었다.

 

다섯살쯤 되었을 내가 논둑에 서서 손에 들고 있던 바가지는 기억하는데 그 속에 동네분들이 준 된장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다만 길고 긴 논둑과 앞으로 얼마나 가야 될지 모를 여행의 두려움이 지금도 손에 잡힐 듯하다.


공영방송 NPR에서 최근 이창래씨의 다섯번째 책이 나왔다고 인터뷰를 하며, 현 문단의 가장 뛰어난 작가 중 한 명이라며, 아름답고 잘다듬어진 문체를 극구 칭찬하였다. 나도 공연히 으쓱했었다. 어디에선가 읽은 글에서 본 "유망한 노벨상 후보"라는 말도 흐뭇했다.

 

어느 친구가 청소년이 된 자녀들에게 한국에서의 배고팠던 이야기를 하자 “엄마, 냉장고에 가서 뭘 꺼내먹지 그랬어?” 라고 물었다던 일화가 생각난다.


꿈에서 조차 다시 대하기 싫은 우리 1세들의 이야기를 우리의 2세, 2세들에게 읽히자.

한 민족의 한과 정을 그대로 그려놓은 "Gestured Life(몸짓뿐인 인생)"도 그들과 함께 읽어보자.
그 고통들을 이겨나온 우리 한인 1세들의 눈물 젖은 승리의 삶을 그들과 함께 이야기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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