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송] 믿음 - (3) 믿음은 행함이다

조회 수 3516 추천 수 0 2014.03.25 17:4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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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는 Luther의 종교개혁 모토 중 하나였던 "Sola Fide"의 너무 강한 영향 아래에 있는 것 같다. 물론 루터가 당시의 상황에서 ‘오직 믿음’을 강조한 이유는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그는 믿음과 행함의 균형을 소홀히 했다. 특히 행함을 강조한 야고보서를 “지푸라기의 서신”(an epistle of straw)이라고 한 것은 큰 잘못이라고 하겠다. 그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도리와 은혜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행함을 강조한 야고보서를 낮게 평가한 것이다. 그러나 루터에게는 좀 미안한 말이지만, 성경에는 지푸라기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은 없다.


야고보서는 주로 그리스도인들의 행동을 다루고 있다. 그렇다고 야고보서는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누가 뭐래도 구원은 “믿음을 통해(Through faith), 하나님의 은혜로(By grace)” 받는 것이다. 야고보는 이 사실을 전제로 한 다음에,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의 삶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구원의 조건으로서가 아니라, 이미 구원받은 사람의 거룩한 생활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성경을 대할 때, 부분적으로 깊이 있게 보는 눈도 필요하지만, 전체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안목도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말씀이 서로 연결이 되고, 보충이 되어, 그 뜻이 더욱 분명해진다. 그 하나의 예가 바울서신과 야고보서의 관계이다. 이 둘은 서로 보충하여 하나님의 뜻을 보다 더 분명히 해준다. 바울은 믿음으로 구원받는 도리를 강조한다. 그러나 야고보는 행함으로 믿음을 사용하라고 한다. 이 둘은 서로를 보충하고 있다.


개신교는 바울과 루터의 전통에 서서 ‘믿음’을 강조한다. 그러다 보니 생활이 좀 약해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온전한 생활을 강조하는 야고보서는 한 쪽으로 치우치기 쉬운 우리의 약점을 보충해 준다. 그리하여 믿음과 생활이 함께 가는 아름답고 균형 잡힌 생활을 하게 한다.

 

본회퍼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십자가 위에서 고귀한 희생을 치르시고, 값비싼 은혜를 베푸셨는데, 우리의 값싼 믿음이 그 은혜를 값싼 은혜로 만들고 있다고 했다. ‘오직 믿음으로만’을 강조하면서 삶과 실천을 등한히 하는 우리의 치우는 믿음이 기독교를 값싼 종교로 만들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 세상으로부터 싸구려 취급을 당하며, 외면당하는 모습이 되어버렸다. 우리의 값싼 믿음이 스스로의 권위를 추락시켜 짓밟히는 모습이 되게 했다.

 

예수님은 듣는 자들에게 “이 말에 찬성하느냐?” 혹은 “이 말이 괜찮게 들리느냐?” 하고 묻지 않으셨다. 다만 “나를 따르라!”, “이것을 행하라!” 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제자도를 요구하셨지, 단순한 지적인 동의나 찬성을 요구하지 않으셨다.

 

눅 10:25절 이하에 한 율법학자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질문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예수님은 그에게 되물으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하였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 그가 대답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고, 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하였습니다.” 그 대답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네 대답이 옳다. 그대로 행하여라. 그러면 영생을 얻을 것이다.”


이 율법학자의 문제는 행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대답은 잘했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주님을 찾아 온 것은 그가 이미 알고 있는 것에 무엇을 더 보태기 위해서였다. 즉 더 많이 알려고 한 것이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도 받는 유혹이다. 우리의 문제는 더 많이 깨닫고 이해하려는 것이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행하려고 하지 않는다. 알고 있는 것도 행하지 못하면서, 더 알려고 하는 것이 우리의 문제이다. 오늘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순종하여 행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그 율법학자의 문제를 지적하셨을 때, 그는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다시 예수님께 질문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이 율법학자의 관심은 자기를 의롭게 보이는 것이었다. 내 이웃이 누구냐고 질문을 한 동기는 자기를 자랑하기 위해서였다. 자기는 이미 이웃을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만만했기에 예수님의 대답이 자기의 의로움을 확인해 줄 것으로 확신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착각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은 소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시고는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으셨고, 그 율법학자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하자, 이렇게 말씀하셨다. “가서, 너도 그와 같이 하라.”

 

예수님의 말씀은 이런 것이다. “너의 문제는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것이다. 너도 가서 사마리아 사람처럼 행하여야 한다.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어 주고, 짐승에 태워서,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준 것처럼, 너도 그렇게 하라. 네 주위에서 너를 좋아하는 사람, 또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너의 이웃이 아니라, 강도만난 사람이 너의 이웃이다. 네 주위에는 물질의 강도, 마음의 강도, 영혼의 강도만난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의 이웃이 되어, 그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이 네가 할 일이다.”


우리도 이 율법학자와 똑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도 다 행하지 못하면서, 더 알려고 한다. 즉 우리는 성경을 머리로만 이해하려고 한다. 그러나 성경말씀은 이해해야 할 것이 아니라, 순종해야 할 것들이다. 성경말씀은 우리가 순종하기를 바라고 있는데, 우리는 팔짱을 끼고 앉아서 생각하고, 분석하고, 이해하려고 한다.

 

사람들은 좋은 설교 듣기를 원한다. 설교를 통해 감동을 받고 싶어 하고, 새로운 이해와 깨달음을 얻으려고 한다. 그리고 새로운 것을 깨닫고, 감동을 받으면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깨닫고 느낀 것만으로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진정한 은혜는 행함으로 삶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설교는 오락이 아니다. 듣고 즐기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앉아서 듣고, 즐기고, 지적으로 혹은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으로 끝낸다. 현대인의 가장 큰 관심은 “어떻게 인생을 즐기느냐?” 하는 것이다. 학교에서, 직장에서, 가정에서 사람들은 즐기고 싶어 한다. 운동도 자기가 실제로 하는 것보다, 관람하며 즐기는 것을 더 좋아한다. 그래서 요즘 TV 프로그램은 운동경기와 오락 프로그램에 치중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경향이 신자의 삶과 교회 안에까지 들어와 있다. 사람들은 보고, 듣고, 즐기기를 원한다. 재미있는 설교를 듣고 한바탕 웃고 나면 은혜를 받았다고 한다. 예배와 설교가 말로만 끝나고, 생활과 연결되지 못한다. 예배와 말씀을 사람들의 재미를 불러일으키는 수준으로 떨어진 오늘의 교회 모습은 분명히 타락한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자신을 속이는 것”(약 1:22)이다. 우리가 단지 듣고, 생각하고, 이해하고, 동의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할 때, 그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진리의 반쪽도 못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반쪽도 못되는 것을 전부인양 생각하는 그것으로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야고보서 1장 25절은 이렇게 말씀한다. “그러나 자유를 주는 완전한 그리스도의 법을 마음속에 새기고 그것을 지키는 사람은, 듣고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그가 하는 일에 복을 받을 것입니다.” 듣는 자가 아니라,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순종되지 않은 말씀은 아무 능력이 없다. 순종하여 행할 때, 말씀의 능력이 드러나는 것이다.

 

초대교회 시대에 사막의 수도자 중에 John Colobos라는 교부가 있었다. 하루는 그의 스승이 말라 죽은 나무를 심어놓고는 이렇게 명했다. “이 나무가 열매를 맺을 때까지 매일 물을 한 바가지씩 주도록 하여라.” 우물이 거처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Colobos 교부는 물을 긷기 위해 저녁에 집을 나섰다가 새벽녘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삼 년의 세월이 지나자, 그 나무는 다시 살아나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그의 스승은 열매를 따다가 교회로 가져가서 형제들에게 나누어주며 말했다. “자, 순종의 열매를 잡수어 보시오.”


순종은 이렇게 귀한 열매를 맺는다. 때로는 이해하지 못하지만, 순종할 때 능력이 나타난다. 자식이 부모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라도, 부모를 신뢰하고 순종해야 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믿음이다. 깨닫지 못해도,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여 순종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한다. 우리가 들은 말씀은 사랑과 정의라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 그러므로 모든 말씀은 우리에게 대한 강한 도전으로 다가 온다. 말씀은 말씀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말씀이 성육신되어야 한다. 성육신 된 말씀만이 생명이 있고, 구원의 능력이 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다. 예수님 자신이 성육신된 말씀이었고, 그분의 행동 하나 하나가 말씀에 순종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말씀에는 생명이 있었고, 그의 행동에는 구원하는 능력이 있었고, 사탄의 권세를 제압하는 권위가 있었다.


여기까지 읽으신 분들 중에 제 글에 동의하는 분이 계실 것이다. 깨닫고 감동받은 분도 계실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문제는 교회 문밖을 나가는 순간부터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이제부터 어떻게 하겠는가?


지금까지 우리 기독교의 믿음에 대해 제가 생각하는 바를 함께 나누었다. 결론적으로 우리의 향주덕에도 심각한 불균형이 있지만, 믿음도 많이 치우쳐 있다. 향주덕의 균형을 회복하기 이전에, 먼저 우리의 믿음부터 균형을 회복해야 하겠다. 구원받는 믿음,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 행하고 순종하는 믿음으로 균형을 회복함으로 아름다운 조화를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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