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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역사에 대한 12년간의 연구결과보고

대한민국 국민에5.18역사에 대한 12년간의 연구결과 보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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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5.18역사를 12 동안 연구했습니다. 5.18역사는 일본의 역사왜곡을 능가하는 역사왜곡 사례임을보고 드립니다아니 그보다 100배는  부끄럽고 악랄한 역사왜곡의 사례입니다. 5.18 대한민국을전복하기 위해 북한이 병력을 보내 일으킨 폭동의 역사였음을 보고 드립니다북한이 10.26이후 꾸준히 소단위로 내려 보낸 600명의 특수군으로 하여금 광주에서 천대받는 양아치 구두닦이 목공 석공 철공  사회불만세력을 소모품으로 사용하여 폭동을 일으켰다는 연구결과를 보고 드립니다무고한 광주시민들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살해하여 놓고 그것을 계엄군의 소행으로 모략하여 남남전쟁을 유발하려 했던세계 전사   유례가 없는 북한의 적진침투 게릴라 작전이었음을 보고 드립니다.

 

광주가 주도한 민주화시위는 전혀 없었음을 보고드립니다. 1980 5 18 이후 광주의 지식인교수,학생 모두가 스스로도 비겁하다 토로했을만큼 꼭꼭 숨어 있었는데 무슨 목숨을  민주화시위가 있었다는 말입니까이제까지 35년간 우리는 북한에 능욕당했고좌익들에 놀아났습니다북한군이 광주에와서 분탕질을  천하의 수치스러운 치욕의 역사를 놓고 대한민국이 나서서 한국 민주주의를 드높인민주화운동이라고 해마다 기념하고 있는  기막힌 수치를 언제까지  덮고 살아야 하는 것인지 자문해 주시기 바랍니다.

 

1980 5 17 자정을 기해전국에는 살벌하고 삼엄한 계엄령이 집행되고 있었습니다김대중이 국가를 상대로 최후통첩을 발표하였습니다5 19일까지 계엄을 철폐하고 최규하-신현확 내각을 해체하고 전국혁명내각을 구성하겠다” 이런 내용으로 확답하지 않으면 5 22일을 기해 전국 봉기를 단행할 것이라 협박한 것입니다이는 당시 김일성이 간첩들에 내린 '전민봉기교시와 정확히 일치하였습니다당시 무엇을 믿고 그런 선전포고를 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김대중은 북악파크 호텔에서 4-5월에 걸쳐 4차례씩이나 회동하여 김대중을 수반으로 하는 혁명내각 명부까지 작성해놓고 있었습니다정부는 5 17 밤중을 기해 전국의 경찰들로 하여금  지역에 문제가 될만한 야권과 운동권 인물들을일거에 체포하여 이른바 고문을 시작하도록 하였습니다대한민국 전체가 숨도 크게 쉬지   만큼얼어붙었습니다체포되지 않은 운동권과 학생들은 모두 깊이 숨어 문밖출입조차 삼갔습니다. 5 18일은 가장 무서웠던 급냉의 날이었습니다이럴  감히 어느 광주인들이 집단으로 나서서 민주화운동이라는    있겠습니까?

 

2001년은 광주공화국이 대한민국 위에 군림하던 시대였습니다  5.18 영웅이라는 사람들이 5.18기념재단이 마련한 증언록에 그들이 겪은 모든 것들을 진솔하게 털어놨습니다저는  책들을 입수하였습니다그리고  내용들은 유네스코에도 제출돼 있습니다여기에 수록된 내용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5 17 자정을 기해 광주의 모든 운동권들은 경찰에 잡혀가 고문받기 시작했다잡히지 않은 운동권지도자들은 모두 도망가 깊이 잠적했다정동년은 낌새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가 잡혀가 고문을 받았지만전남대 운동권 최고 지도자라는 윤한봉과 박관현은 항쟁“ 기간 내내 도망가 있었다평시 운동권에 얼씬거렸던 광주의 지식인들교수들학생들도 항쟁기간 내내 도망가 자취를 감추었다특히 518일에는 물론 항쟁기간 내내 광주시내에는 학생들이 나오지 않았다지각 있고 분별력 있는 사람들은 시내에 나오지 않았다시내에 나온 사람들은 개념 없는 10 소년들과 양아치  사회불만세력들이었다군법회의에서 사형과 무기징역을 받은 사람들은 계엄군이 광주를 포기하고 외곽으로 철수한이후 호기심 등의 이유로 이리 저리 살피면서 도청에 들어왔다가 5 26 낮과 밤에 극히 소수의 강경파 건달들에 줄을 잘못 섰던 대가를 치른 사람들이다이들은 개념 없는 남남들로 구성되었으며 거의가  구두공 화물차운전수  20대의 사회불만 계층들이었다꼬마 운동권 청년들은 시위 기간에 어쩌다 아지트에서 만나 의논을 하다가도 조금만 위험한 징조만 나타나면 각자도생 하자며 뿔뿔이 흩어져 도망다녔다예비군 출신은 거의 없었고거의가  총기를  다루지 못했다.

 

위와 같은 광주 분위기는 대한민국 전체지역의 평균 분위기였으며지금 우리가 생각해 보아도 충분히납득되는 그런 분위기일 것입니다그런데이런 살어름판 분위기 속에서 광주에서는 5 18일부터 21일까지 아래와 같은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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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자동자공장에서 장갑차와 트럭을 몰고 나가는 모습, 이마의 수건은 자기들끼리 통하는 피아식별 비밀표시


5 18일부터 5 21일까지의 광주상황

1) 5 18(전남대에는 전라도 출신이 대부분인 금마주둔의 7공수여단 33대대가 파견돼 있었고공수대원 20명이 전남대 정문 앞에 일렬로 서서 휴교령을 집행하고 있었습니다오전 9:30분경 대학생으로 보이는 250여명의 시위대가 나타나 공수대원들에 도서관에 가겠다며 시비를 걸었고 된다 귀가하라하자 책가방에 숨겨온 각이  돌멩이를 던져 여러 명의 공수대원들에 피를 흘리게  ,공수대원들이 추적할  없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금남로 번화가로 도망을 갔습니다거침없이 수십 개의 파출소에 불을 지르고 경상도 군인들만 뽑아 전라도 70% 몰살시키려 왔다 등의 유언비어를퍼트렸습니다사람들은 불이나면 조건반사적으로 몰려듭니다이것이 5.18  장면이었습니다.

 

국민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광주의 모든 학생들대한민국의 모든 학생들이 쥐죽은  숨어 있었던 무서운 순간혹시라도 경찰이 오해하여 자기를 잡아갈까 꼭꼭 숨어 있었던  시각에 어떻게 광주학생들이 250명씩이나 집단을 만들어 계엄군을 찾아가 감히 돌을 던지고 파출소들에 불을 질러 군중을 모을 생각을   있었겠습니까이는 한국군의 한계를 정확하게 꿰뚫고 그에 대해 오랜 기간 훈련해온 배포  특수집단이 아니고는 있을  없는 일일 것입니다.

 

2) 이후 이들이 사용한 다양한 공격기법들이 선을 보였습니다부나비들에 환각제를 먹이거나술을 먹인  대형차를 몰고 계엄군 집합대열을 향해 고속의 지그재그 궤적을 그리게 하면서 돌진시키는 방법,악세레다를 고정시켜놓고 계엄군을 향해 달리게 하다가 뛰어내리게 하는 방법대형 변압기를 폭파시켜 MBC 건물을 불태운 방법불타는 휘발유 드럼통을 계엄군을 향해 굴리게 하는 방법광주의 어수룩한 10대와 20대를 차에 태워 이곳 저곳에 내려놓고서로가 서로를 계엄군으로 오해케 하여 사격하게하는 방법  매우 대양한 방법이 동원되었습니다이로 인해 계엄군은 5 19 아침부터 수세에 몰려그야말로 중과부적의 상태에서 공포감에 떨며 매타작을 당하면서실탄을 달라철수를 시켜달라 지휘관에 요청하기에 이르렀습니다.

 

3) 드디어 5 21일이 되었습니다이날은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계엄군이 시위대에 집단발포를 해서수백 명이 죽고 수천 명이 다쳤다고 묘사했던 바로 그날입니다이날  발포 명령을 누가 내렸느냐,전두환이 내렸을 것이다” 하면서 한껏 의혹을 부풀렸던 바로 그날입니다이날 아침 08:00 정각에300명으로 구성된 학생집단이 광주 톨게이트에 20사단 차량부대가 통과할 것이라는 극비  극비 정보를 입수하고 매복해 있다가 08시에 기습공격을 가했습니다부대는 혼비백산 흩어졌습니다감히 어느 나라 학생들이 300여명의 세력을 형성하여 감히 부대이동정보를 알아가지고 매복까지 하면서 기습공격을 감행할  있겠습니까?

 

 300여명의 학생단은 사단장 지프차 1호를 포함해 무전기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14대의 지프차를탈취해가지고 곧장 군용차량을 생산하는 아시아자동차 공장으로 달려갔습니다아시아자동자 직원들은  어마어마한 지휘용 지프차들과 사단장용 1호차를 보자마자 대세를 짐작하고는 순순히 그들의 요구대로 장갑차 4대와 군용트럭 374대의 열쇠를 내주었습니다.

 

이때  다른 300여명의 학생단이 5대의 대형 버스를 몰고 아시아자동차 공장에 합세했습니다이들600명은 전남 17 시군에 꼭꼭 숨어있는 44개의 무기고를 향해 예행연습을  듯한 매너로 곧장 달려가서 무기고를 솜씨 있는 방법으로 털었습니다. 2 연대 분이었습니다갈때는 쏜살같이 무기고를 향해 운전하더니 무기를 싣고 광주로 돌아올 때는 여러 차례 길을 물었습니다유동3거리에  놓고도 사람들에 유동3거리가 어디냐고 물었습니다나머지 트럭과 장갑차 4대는 도청 근방에 집결하여 계엄군과 대치하였습니다가장 빨리 털린 무기고는  12시에 가장 가까운 곳에서 털린 나주경찰서 무기고였습니다가장 늦게 털린 무기고들은 광주에서 멀리 있는 지역에서 거의 동시에 털렸는데  시각이오후 4시였습니다이러한 기록은 북한이 발간한 대남공작 책자들에도 있고, 1995 7 18일에 발간된 검찰최종보고서와 안기부 자료에도 있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당시 정보당국은 정보분석을 세밀하게하지 않고원자료 상태로만 남겨놓았습니다.

 

가장 괄목할만한 상황은 이들 600명의 학생부대가 8 분량의 TNT 전남도청 지하실에 옮겨놓고 순식간에 포탄으로 조립해놓았다는 사실입니다이런 조립  해체 능력을 가진 사람은 당시 전라도 계엄분소 전체에 오직  사람 5급문관인 배승일 뿐이었습니다현역 군인들은 장교든 병사든 이런 능력 없습니다.

 

광주사태 최고의 하이라이트인 5 21영화 화려한 휴가에서는 이날 오후 1시경계엄군이 집단 발포를 했다고 표현했습니다이는 구전되어 국민 모두가 그렇게 믿어왔습니다그러나 이는 지어낸 거짓말입니다당시 광주에는 장갑차를 몰만한 예비군도 없었고총기를 만질  아는 예비군도 시위에 나오지 않았습니다예비군들은 5.18 증언자들의  그대로 대학생들보다  사리분별력이 많은 사람들이기에 나올 리도 없었습니다오후 1  대의 장갑차가도청 앞에 집결해 있는 공수부대원 수백명을 향해 지그재그로 돌진하여 1명의 병사를 현장에서 깔아죽이고 1명에게 중상을 입혔습니다그렇게 질주하기를  차례나 반복 했습니다공수부대 병사들은 31사단 소위가 헬기로 철수하면서 공수대원들이 실탄 없이 고생한다며 넘겨준 수백발의 실탄을 가지고질주해오는 장갑차를 향해 발사였습니다.

 

저는 이날 광주 일원에서 사망한 사람들의 분포를 조사해 보았습니다그날 광주일원에서 발생한 민간사망자는 모두 61명이었습니다 중에서 28명은 도청과는 거리가  다른 곳들에서 사망했고, 33명만이 도청 앞에서 사망했습니다그러면  28명은 누가 죽였겠습니까도청  사망자 33명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33  20명은 칼에 찔리고 몽둥이에 맞아 사망했습니다그런데 당시 도청 앞에서는 계엄군과 시민이 수십 미터의 거리를 두고 대치해 있었습니다맞아 죽고 찔려죽은 사람은 공수대원과 상관없이 죽은 사람들입니다그러면 이들 20명은  누가 죽인 것입니까한발  나아가 살펴보았습니다매우 놀랍게도 도청 앞에서 총에 맞아 사망한 13 모두가 무기고에서 나온 총들에 의해 사망했습니다한마디로 5 21일에 칼에 찔리고 몽둥이로 맞고 총에 의해 사망한 61 모두가 계엄군과는무관한 사망이었던 것입니다.

 

광주사태 10 동안 사망한 민간인은 166명입니다차량사고로 죽은 사람찔려 죽은 사람형체를 알아볼  없을 만큼 으깨진 사람목이 잘린 사람불에 그을린 사람총에 맞은 사람 등입니다. 5 21일에 사망한 사람들에서 보았듯이 이들 주검들의 대부분은 공수부대에 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166명의사망자  총상 사망자가 116명으로 가장 많았습니다제가 모두 여러 차례 세어보니   69% 해당하는 80명이 무기고에서 탈취한 총들에 의해 사망했고, 36명이 계엄군이 소지한 M16 의해 사망했습니다. 1982 육군본부가 발행한 계엄사 141 상단에는 총상사망자 수가 117이중 75% 88명이 무기고에서 나온 총들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앞서 저는 5 21 통계를 제시해 드렸습니다도청과는 거리가  곳들에서 사망한 28명은 누가 죽인 것이며도청 앞에서 칼과 몽둥이에 의해 사망한 20명은 누가 죽인 것이며도청 앞에서 무기고 총에의해 사살된 13명은 누가 죽인 것이겠습니까과연 광주시민이 80명이라는 광주시민을 쏘았겠습니까?광주시민이 쏘았다면 5.18 자작극이 되는 것이며 광주는 시민이 시민을  뒤에서  패륜의 도시가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칼에 찔리고 으깨지고 머리를 잘라놓은 시체는 계엄군의 소행이 아니었습니다그러면  잔인함의 모두가 광주시민들의 소행이라는 말입니까?

 

도청 앞에서의 특수작전이 얼마나 강한 것이었으면 막강하다는 계엄군이 도시를 포기하고 오후 5시부터  외곽으로 도망을 쳤겠습니까도망가는 길에도 곳곳에서 총격전이 벌어졌습니다전남대에주둔했던 3공수 여단 4 대대는 20 밤부터 전멸당할 위기를 간신히 모면하고  20시간 동안 밀리고 밀리는 공방전을 거듭하다가 21 오후 4시부터  외곽으로 도주하였습니다. 10:1 이상의 중과부적 상태에서  피해 없이 도망친 것이 기적이었습니다.

 

5 18일부터 21일까지 전개된 위와 같은 고도의 게릴라전을 광주의 대학생이광주의 껌팔이 구두닦이 계급들이 나서서 주도했다고 믿을 국민 없을 것입니다이런 작전이 광주인들에 의해 전개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21 계엄군이 철수하고동시에 북한군 600명이 잠수해 있었던, 5 22일에 더욱 확연하게 재확인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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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둥이로 이동 중인 20사단 사령부를 기습공격하여 지프차들을 몰고 가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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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사단에서 빼앗은 지프차 행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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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용트럭 도어 부분에 있는 4명이 몽둥이와 카빈총 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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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갑차에 거치된 기관총장갑복장눈매능숙해 보이는 자세에 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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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 복장으로 위장한 시민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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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복장으로 위장한 북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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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프차에서 지시를 하는 사람들이 주목하고 있는 모습



5 22일부터 5 25일까지의 광주상황

5 21 오후 계엄군이 광주시를 떠나자 광주시가는 갑자기 조용해 졌습니다수백-수천 명씩 모여가지고 수많은 곳들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했던 건물소각차량소각국가자산 소각 행위가 사라지니부나비들도 보이지 않았습니다파괴된 광주를 보면서일부 광주 유지들이 5 22 도청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이상의 희생은  된다 무서운 무기들을 반납하고 계엄군과 관련자 처벌에 대한 협상을 하자  의견이 일치됐습니다그리고  엄청난 무기를 털어온 학생들을 찾았습니다그러나 그런 학생들은 광주에 없었습니다광주시민이 민주화를 위해 무기를 털었다면 이렇게 쉽게 무기를 반납하자는 말이 나올  없는  아니겠습니까?

 

학생들을 애타게 찾자 겨우 나타난 학생이 22세의 전남대학 학생 김창길이었습니다교수들이 도청에나왔지만 교수들은 어떤 학생들이 그런 엄청난 작전을 수행했는지에 대해 알지 못했습니다극히소수의 광주의 유지들교수들이 수습대책위라는 것을 만들었지만 실제로는 22세의 김창길이 YWCA소속의 일부 사람들을 이끌고 무기회수에 나섰습니다전교사에 다니면서 체포된 자들과 무기를 맞바꾸는 일도 했습니다.

 

그는 어린 나이에 참으로 큰일을 했습니다도청에 무기 상태로 조립돼 있는 다이너마이트 더미를 해체해야 광주시가 온전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전교사에가서  정보를 제공하였습니다계엄분소장소준열 장군은 유일한 기술자 배승일 문관을 25일과 26일에 걸쳐 파견하였고김창길은 온건파들과 함께 배문관의 생명을 보호해주었습니다.

 

무기를 손에 쥐어주면 광주시민들이 원수 같은 공수부대와  싸울 것으로 알았던 600무기를 수거하고 반납하는 모습을 보자 몸이 달았습니다복면을 하고무기를 들고차를 몰며날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자기들을 믿고 끝까지 항쟁하라고 독려하고 다닌 것입니다광주시민들의 분노를 다시 솟구치게 하기 위해서로가 서로를 계엄군으로 오해하도록 상황을 만들어 주었습니다그래도 광주시민들은 그들에 놀아나지 않았습니다무기회수가 지속되었습니다. 600명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길은 교도소를 점령하여  속에 수용돼 있는 2,700여명과 180여명의 좌익수를 풀어 폭동의 맥을 이어가는 것이었습니다이들은  6회에 걸쳐 교도소를 공격했습니다.

 

육군본부 정보보고에 의하면 당시 북한은 교도소를 공격하라는 지시를 계속 내보내고 있었습니다교도소쟁탈전은 남북한 특전부대끼리 벌이는 치열한 전투였습니다호를 깊이 파고 있었던 공수부대와장갑차  군용트럭을 타고 앞으로 전진하던 600명과의 전투는 아군의 승리로 끝났습니다아마 여기에서 600명중 상당수가 죽었을 것입니다북한군은 죽기 전에 각가지 방법으로 증거를 없앱니다그리고 남은 특수군은 5 26 밤과 27 새벽에 안개처럼 사라졌습니다북한의 조국통일사가 1982 3 20일에 발행한 주체의 기치따라 나아가는 남조선 인민들의 투쟁 595쪽에는 5 26 600여명의광주학생시민들은 도청 지하실에서 최후의 항쟁을 선언했다. 기록이 있습니다600 북한의 대남공작 역사책들에 공동으로 나타나는 암어입니다. 2013 5 15 채널A에는  북한특수군 신분으로 광주에 투입되었던 가명 김명국이라는 탈북자가 그의 침투사실을 증언하였습니다.

 

여기까지가 계엄군이  외곽으로 빠져나가 있던 5 22일부터 25일까 전개됐던 광주의 모습이었습니다 기간  광주인들에 의한 민주화시위는 전혀 없었습니다광주시민들에게는 오직 '역겨워 보이는 무기' 회수하여 반납하는 일이 가장 중요했습니다이때에도 광주 학생들은 은신 칩거 중이었습니다온건한 생각을 가진 22세의 김창길이 주도하는 대로 무기반납 운동이 이루어졌다면 광주사태는 여기에서 평화적인 피날레를 장식하였을 것입니다그런데 25 밤중에 돌연히 사태가 악화되었습니다.

 

부산항에 미국 항공모함이 왔는지에 대한 정보는 광주시민들이 쉽게 접할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으며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해한 정보판단 역시 광주의 20 젊은이들에는 어울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그런데 26세의 조선대생 김종배가  사실을누군가로부터 전해 듣고 열흘만 견디면 미국이광주를 도와줄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정보를 믿은 그는 결사항쟁을 생각해냈습니다당시 항공모함이 극비리에 부산에 오는 것은 맞는 정보였지만 항공모함을 타고 오는 미군이 광주폭도를 도와주리라 생각한 것은 넌센스였습니다아마도 구군가로부터 잘못된 판단을 제공받았던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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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26일과 27 새벽까지 전개된 광주상황


25 밤늦은 시각김종배화물차 운전사 박남선(26), 30 회사원 정상용, 5.18 상징인 30 윤상원, 27세의 조선대 출신 허규정이 주축이 되어 김창길 등을 권총으로 위협하여 축출시킨  수습위원회를항쟁본부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결사항쟁을 선포했습니다이들의 진술에 의하면 이들은 거의 서로가생면부지의 처지로 도청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이었습니다김종배가 항쟁본부 총사령관이 되었습니다.항쟁본부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인  그룹은 불과 80 정도로 구성된 콩가루 집합체였으며주로 고교생과 막노동자들로 구성됐습니다이들만 아니었다면 광주 재진입작전은 없었을 것이며, 27 새벽에 발생한 17명의 민간 사망자도 발생하지 안았을 것입니다고교생들은 대부분 죽었고항쟁본부 간부들은 항복을 표시하여 살아남았습니다그리고 오늘날 신흥귀족으로 등극해 있는 것입니다. 5 2705:23일부 개념 없던 광주 젊은이들의 마지막 경거망동으로 인해 광주사태는 비극의 종말을 맞이했던 것입니다.

 

계엄사는 바로  마지막 5 26일에 참여했던 개념 없던 부나비들에게 사형과 무기징역을 선고했습니다군법회의에서 사형을 받은 사람들의 명단을 보시면 광주폭동 마지막 날에 줄을 잘못 서서 중죄를받은 사람들이 어떤 부류의 사람들인지  드러날 것입니다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은 5명이며 이들은정동년(37, 건달에 가까운 복학생), 배용수(34,운전수), 박노정(28,인쇄업), 박남선(26, 화물차 운전수),김종배(26,학생)입니다무기징역을 받은 사람은 윤석루(20,구두공허규정(27,학생정상용(30,회사원)하영열(31,공원윤재근(28,공원서만석(36,상업홍남순(67,변호사)였습니다이들은 주로 5 23일에서 25 사이에 도청으로 처음 들어간 사람들이며 5 18일부터 5 22일까지의 폭동에는 가담하지않았습니다.

 

계엄사는 5 18일부터 21일까지 광주시를 파괴하고 광주 시민을 살해하고광주의 부나비들로 하여금 계엄군을 살해케  고도의 게릴라작전 수행자들에 대해서는  실체조차 파악하지 못했던 것입니다여기까지가 대략적인 광주소요 10일간에 전개됐던 상황을 요약한 것입니다.

 

10일간 상황에 대한 결론

저는 2004년부터 김영삼 시대에 전두환 등을 재판한 수사기록  재판서류 18만쪽을 획득해서 연구했습니다세상에 알려진 5.18지식은 모두 가짜였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국민이 알고 있는 지식은 황석영 이름으로 1985년에 발간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라는  내용 그대로였습니다그런데저는  책이 북한이 작성해 황석영 이름으로 발간한 책임을 증명하였습니다지금 국민이 알고 계시는지식은 모두 북한이 선전한 내용 그대로라는 사실을 국민께 보고합니다그리고 1997 4 17일의 대법원 판결이 매우 잘못된 판결일 뿐만 아니라 북한 인민공화국 판사의 입장에서 내린 판결이라는 것도밝혀냈습니다 내용들은 1,720 쪽에 달하는 4권의  수사기록으로  12.12 5.18 수록되어2008년에 발간되었습니다.

 

 책이 발간되자마자 5.18단체들이  다시 소송을 걸었습니다. 2002년에 이어  번째 소송이었습니다북한특수군이 민주화운동에 개입됐다고 표현한 것은 신성한 민주화운동의 명예를 훼손하였다는 것입니다두번째의 재판 도중 저는 김일성이 1989년부터 황석영과 윤이상을 불러 미국과 한국을 모략하기 위해 제작한 5.18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 찾아냈습니다. 2010 1월이었습니다지금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님을 위한 행진곡  북한영화의 주제곡이었음도 처음 발견하였습니다대남-대미 모략영화의 주제곡을 어찌 한국정부가 5.18기념곡으로 지정할  있겠습니까?

 

북한이 제작한 대남공작 역사책통일부자료탈북자의 수기사진일본자료 등을 망라하여 저는 5.18광주에 북한 특수군 600명이 왔다 결론을 도출하였고 새로운 결론과 자료들이 법정에 제출되어저는 소송 5년만인 2012 12 27일부로 1,2,3심을 모두 무죄로 장식하게 되었습니다여기까지만 해도 5.18광주에는  개의 실체  광주시위대와 북한특수군 600명이 따로 존재하고 북한특수군이 나름의 모략작전을 수행하고 갔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저는 5.18기념재단에서 모은 증언내용들과 광주가 유네스코에 제출한 자료들을 분석했습니다그리고 2014 9 1전혀 새롭고 가공할 결론을 도출해 냈습니다. 5.18광주폭동의 주도세력은 북한특수군 600명이고광주가 형성한 시위대는 일체 존재하지 않았으며, 600명이 벌인 작전에 참가했던 광주인들은 분별없고 개념 없는 하층 뜨내기 노동자광주에서 천대받으면서 세상 한번 뒤집어 보고 싶다는 충동을 안고 사는 부나비들이었다는 가공할 결론을 도출하였습니다따라서 광주에는 5 18 이후 민주화운동이 전혀 없었고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얼마나 기막힌 결과입니까?

 

5.18 사람들은 시위대의 중심에 윤상원이 있었다며님을 위한 행진곡 바치는 행사까지 치렀습니다그러나 윤상원은 시위대를 구성한 적이 없습니다. 5 21 총이 쏟아져 나오는  순간까지 그는녹두서점에 후배와 함께 숨어보초서는 계엄군의 무기를 빼앗을 상상을 하다가 현실성이 없자후배를시켜 돌멩이 대신에 철근조각과 나사뭉치를 공격도구로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5.18 대한  개의 판결은  파기돼야  대상입니다

<1981년의 5.18재판>

1981 4 1일짜 대법원 판결의 핵심입니다정동년이 김대중에서 500만원 받아 300만원은 박관현에게, 200만원은 윤한봉에게 주어 학생시위를 주도했다.” 그러나 정동년은 5 17 밤에 잡혀 갔고,박관현과 윤한봉은 도망가 있었습니다광주의 운동권대학생교수  거의 모두가 시위기간 내내 잠적해 있었습니다학생 시위대를 구성한다는 것은 상상할  없는 환경이었습니다.

 

1 군법회의에서 사형과 무기징역을 선고당한 사람들은 모두 12명으로 이들은 거의  광주에서 천대받던 사회불만세력들이었고계엄군이  외곽으로 빠지면서 전남도청에 처음으로 들어와 5 26새벽부터 25시간 동안 객기를 부리다 계엄군의 재진입작전을 초래한 부나비들이었습니다이들은 정동년  운동권과 아무런 관계가 없던 뜨내기 노동자들이었고그들은 거의  서로 일면식이 없는 콩가루들이었습니다.

 

1981년의 재판부는 이동 중인 20사단을 공격한 300 조직의 실체, 44 무기고를 불과 4시간 만에 600 조직의 실체경찰만 보아도 가슴이 뛰었던 바로  순간에 전남대 앞에  있는 계엄군에게 감히 돌멩이 공격을 감행하고곧바로 중심가로 달려가 파출소들을 소각하여 부나비들을 끌어들인 250명의 실체를 밝히지 못했습니다. 1981년의 재판은 사리에 맞지도 않았습니다.

 

<1997년의 판결>

1997 5.18판결문의 핵심입니다광주시위대는 신군부로부터 헌법을 수호하기 위해 결집된 -헌법기관이다시위가 전국으로 속히 확산됐어야 했는데 신군부가 무력으로 조기에 진압한 행위는 분명한내란행위다.

 

그러나 광주에는 광주인들이 독자적으로 구성한 시위대가 없었습니다광주에서 유일했던 시위대는 북한특수군 600  뿐이었고나머지는 이들이 동원했거나 이들에 부화뇌동한 철없는 10대와 하층계급의 노동자양아치무직의 청년들이었습니다. 1997년의 판결은 북한특수군 600명에게 영광의 면류관을 씌워준 세기의 코미디 판결이라고 생각합니다그러면 가장 중요한 숫자 600명이 어떤 자료에서나왔는지 살펴보겠습니다먼저 한국 정부 기록입니다.

 

<600명에 대한 한국정부측 자료>

1) 1995 8 17일짜대한민국 검찰이 작성한 광주사건 관련 최종조사보고서 92-93쪽에 있는 내용입니다.

 

02:30 용산을 출발고속도로를 경유하여 08:00시경 광주에 도착한 20사단 지휘차량 인솔대는 광주공단 입구에서 진로를 차단한 수백 명의 시위대로부터 화염병 공격을 받고 사단장용 지프차  지휘용지프차 14대를 탈취 당하였는데 과정에서 사병1명이 실종되고, 2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09:00시경20사단 지휘차량을 타고  시위대 300 명과 고속버스 5대를 타고  시위대300 명이 아시아 자동차 공장을 점거하고 장갑차 4대와 버스  차량 (3)56대를 탈취하여 광주시내로 진출하였음

 

2) 1985.5. 안기부가 작성한 광주사태 상황일지  피해현황 40-41쪽에 있는 내용입니다,

 

5 18 14:25, 학생 유동3거리에 학생 300광주공원의 학생 300명이 출현, 15:50, 학생 600여명도청방향으로 이동하며 시위학생 300명은 전두환 물러가라김대중 석방하라민주인사 석방하라구호 외치며 동산파출소에 투석 파괴 다른 300명은 16:40 지산파출소 파괴하며 시위

 

<600명에 대한 북한당국측 자료>

1) 북한 조선노동당출판사가 1985.5.16. 발간한 광주의 분노 35-36쪽에 있는 글입니다.

 

폭동군중은 괴뢰들의 군용차량공장인 아세아자동차 공장 습격하여 314대의 군용차량을 로획하였으며  밖에도 414대의 각종 차량들을 탈취하였다봉기군중들은 로획한  차량들을 타고 다니며놈들의 무기고들을 들이치고 많은 무기들을 로획하였다특히 600여명으로 구성된 폭동군중의  집단은 괴뢰군 199지원단 1훈련소의 무기고를 기습하여 숱한 무기를 탈취하였고 지원동 석산의 독립가옥에 보관되여 있는 많은 폭약과 뢰관들을 빼앗아내였다.

 

이리하여 무기탈취투쟁을 시작한 21 오전부터 오후4 현재까지 폭동군중이 탈취한 무기는 카빙총2,240-1보총 1,235권총 28실탄 4 6,400여발이였고 장갑차가 4군용차량이 400여대에 달하였으며 수백키로그람에 달하는 폭약과 수백개의 뢰관들도 획득하였다무기획득을 위한 봉기군중들의 투쟁은 이날 오후부터 광주의 주변지역에로 확대되였다.

 

2) 북한의 조국통일사가 1982 3 20일에 발행한 주체의 기치따라 나아가는 남조선 인민들의 투쟁595쪽에 있는 글입니다.

 

5 26 600여명의 광주학생시민들은 도청 지하실에서 최후의 항쟁을 선언했다.

 

<600명에 대한 광주현장의 자료>

1) 광주 동아일보 김영택 기자의 검찰 신문조서

그전에도 ·고대생 300 명이 광주시내에 도착했다고 했는데어떤가요.

 

위와 같이 대학생으로 보이는 사람들 500 명이 광주시내에 나타나던  1045분에 저는 도청앞에서 취재하고 있었는데항쟁본부에서 스피커를 통하여 ·고대생이 광주에 도착했다고 하며 위와같은 방법으로 환영행사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다음날인 523 오후경 복면부대가 나타나 시위를 더욱 과격화시키고 확산시켰다고 했는데,그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시위하던가요.

 

저는 당시에 도청   금남로 일대에서 복면부대들이 하는 시위광경을 지켜보았는데그들은 수십 대의 버스와 트럭  차량을 타고 다니면서 몽둥이를 각자 하나씩 들고 차량을 치면서 전두환 물러가라신현확 물러가라계엄해제하라김대중 석방하라 등의 구호를 외쳤습니다이를 통하여 주위에 있는 기존의 시위대들로 하여금 시위를 과격하게 하도록 유도했으며그때부터 시위는 더욱가열되고 확산되었습니다그들은 기존의 시위대학생 등이 총기를 반납하고 대화로써 사태를 해결하려고 하자 이를 반대하며 총기를 반납하지 못하도록 제지하고우리는 끝까지 투쟁을 하여야 한다 외치면서 시위를 과열시켰습니다.

 

복면부대들이 언제까지 시위를 주도했나요.

그들은 5 26재진입작전이 임박하자 어디론지 전부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2) 모랑봉의 꽃으로 불리던 전옥주(본명 전춘심) 증언

'5.18 연고대생의 실체민원에 대한 광주시 답변

민원신청민원제목- 5.18민주화운동 당시 연고대생 600명의 실체와 활동

 

민원내용: 1980년도 당시 광주에서 발생한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그런데 가지 궁금한 점은 당시 5.18단체측이 널리 홍보한 연고대생 600명의 시위 가담에 관한 사실입니다이들의 실체여부와 이들의 당시 활동상황에 대하여 정부측의 자세한 해명과 답변을 듣고 싶습니다.

 

처리기관광주광역시 인권담당관

담당자(연락처)

고경미 (613-2081)

처리결과(답변내용)

 

2. 귀하께서 문의하신 사항에 대하여 알아본 결과 80 항쟁일지에 스피커를 통해 고대생이 서울에서 내려왔다고 발표했다라는 기록이 있으나직접 가두방송을  전옥주씨는  당시 전달받은 쪽지를 읽었을  사실여부는 확인하지 못하였다고 증언하고 있고, 3. 518민주화운동에 고대생 참가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다각적으로 노력하였으나 현재까지 객관적인 자료를 확보하지 못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3) 5.18기념재단의 공식 기록

5.18기념재단의 홈페이지에 광주사태 타임라인 게시돼 있습니다광주사태 시간표인 것입니다여기에 기재된 일지  5 22, 15:08 상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서울서 대학생 5백여명이 광주도착환영식 거행이라고 기록되어 있다가 북한특수군 600명이인터넷공간에서 뜨거운 관심을 끌자2013 7 14일경, 5.18기념재단이 기록을 슬그머니 바꾸어 놓았습니다시위도중 연행된 시민 학생 800여명 석방되어 도청 도착이라고 변조시켜 놓았습니다. 5 21 도청을 접수한 세력이 바로 연고대생 600명이었으며광주는 누군가의 조종에 의해 5 22이들 북한특수군을 서울서  대학생 또는 연고대생으로 부르며 환영식을 거행해 주었습니다당시의 계엄 하에 연고대생 600명이 구성되어 광주로 온다는 것은 불가능하였으며그후 이들 연고대생은  엄청난 보상금을 지급했는데도 불구하고  1명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600명의 북한특수군이 기획-연출-기록을 담당한 역사가 바로 5.18역사입니다지난  5그동안보관만 해오던 황장엽과 김덕홍의 증언이  월간조선 편집장에 의해 방송되고 출판되었습니다5.18 북한이 일으킨  남한에 뒤집어씌운 것이고광주 봉기가 끝난  북한의 대남사업부 간부들이 무더기로 훈장을 받고 술파티를 하였다 내용이었습니다.

 

북한에서는 북한의 최고인 것들에 5.18이라는 호칭을 명예로 수여한다는 사실을 수많은 탈북자들이증언록에서 증언하였습니다. 5.18 글자가 붙어 있는 1 톤짜리 프레스에 5.18청년호라는 글이 새겨진 사진도 입수돼 있고5.18무사고정시견인초과운동이라는 글씨가 있는 철도역 사진도 입수하였습니다5.18영화연구소라는 호칭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나라 신문이 보도하였습니다 외에도 탈북자들에 의하면 전차에도 5.18전진호 '5.18소년호 땅크우수한 생산직장에도 '영예의 5.18청년직장'5.18식품가공공장’ ‘5.18고치청년작업반’ ‘5.18청년제철소 등이 있으며 이런 5.18호칭은 북한사회에 즐비하다고 합니다.

 

해마다 5월이 되면 북한에서는  지역에 걸쳐 여러  동안 5.18 기념하고 추념하는 행사가 대대적으로 열린다는 사실을 탈북자들의 증언과 통일부 주간정세보고서를 통해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5.18순전히 한국인들에 의한 민주화운동이었다면 어째서 북한이 매년 - 최고위급 간부들의 참석 하에기념대회를  지역에 걸쳐 여러  동안 거행하겠습니까이를 증명이나 하려는 북한이 발행한 대남공작 역사책들에는 5.18 북한의 대남공작 역사상 최고수준의 작품이라고 자랑되어 있습니다.

 

5.18 광주사람들이 일으킨 민주화운동이 아니라 북한이 축차적으로 보낸 600명의 특수군으로 하여금 한국정부를 전복하고 남한에 친북정권을 세우기 위해 기획-연출-기록한 대규모 게릴라전이었습니다광주의 운동권이 모두 잡혀갔거나 멀리 도망가 있었고교수대학생들 모두가 벌벌 떨며 숨어 있었다는 사실을 5.18핵심간부들이 진솔하게 증언하였는데어떻게 600여명이 선보인 신출귀몰하던 특수작전을이스라엘의 엔테베 작전보다 훨씬  고차원적인 특수작전을광주학생들이 주도했다는 말입니까?

 

국민 여러분우리는 북한에 철저히 놀아났고, 5.18단체들에 철저히 속아왔습니다. 5.18반역세력이 순국선열을 훨씬 능가하는 유공자 대우를 받으며  나라 주인 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5.18민주화운동은북한과 광주 세력에 의한 대국민 사기였습니다이런 왜곡이 성공함에 따라 한국국민은 그야말로 바지가 되었습니다저들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정부로 하여금  나라에서 획책된 모든 반역의 역사를 애국의 역사민주화의 역사로 인정하는 도장을 찍게 했습니다반역세력이 애국세력으로 등극하고 기득권세력이 되어사회 좌경화를 가속화시키고 있습니다.

 

저는 대한민국 민주화역사의 성지로 군림해온 5.18역사가 진정 민주화 역사인지에 대해 의심을 가지고지난 12 동안 광주 감옥으로 끌려가면서그리고  다른 재판을 5년간 받으면서 연구를 해왔습니다.누구라도 12 동안 하나의 역사를 끈질기게 연구했다면  결과는 일단 국민적 관심을 받아야만 정상적인 국가 사회일 것입니다.

 

저는 1966 육사를 졸업하고 월남전에 참전하여 44개월 동안 공산게릴라와 전투를 하였기에 게릴라특수전을 많이 경험한 사람입니다군의 대위-소령 시절에는 미국 응용수학의 발상지이자 지금도 세계응용수학의 첨단에  있는 미해군대학원에서 응용수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논문에는 2개의 수학공식과 6개의 수학정리를 담아 지금까지도  학교에서는 전설의 인물로 회자되고 있습니다군에서는정보 특기로 근무했고국정원에서는 북한연구를 하였으며국방연구원에서는 군의 작전과 군수 예산분야를 8 동안 연구했고대령으로 예편한  미해군대학원 교수를 3 동안 하고 돌아온 사람입니다이런 자격과 능력으로 12 동안 5.18 분석한 결과 5.18 재판한 2개의 판결문은  휴지화 되어야 한다는 것을 자신 있게 말씀드릴  있습니다제가 연구한  결과가 공론의 장에서 토의되고 결판되어 지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감사합니다.

 

뉴스타운 기사 www.newstown.co.kr   2014.9.7. 논설위원 지만원 박사 제공

<지저스타임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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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 2014.10.24 / 조회수: 0

<성막영성> 출판감사예배 및 공개세미나

"성막영성" 출판감사예배 및 공개세미나 송택규 목사의 "하나님의 감동"으로 쓴 책 ▲ <성막영성> 출판기념회 및 공개세미나에서 저자 송택규 목사와 참석자들이 함께 모여 기념사진을 찍었다. 크리스천영성 대표 송택규 목사가 저서인 <성막영성> 출판을 기념하는 '출판감사예배' ...

일자: 2014.10.23 / 조회수: 0

LA 기쁨의교회 새생명축제

2014 LA기쁨의교회 새새명축제 "안성진 Trinity Music 대표 특별 출연" ▲ 트리니티 뮤직 안성진 대표가 LA 기쁨의교회 '새생명축제'에서 간증을 하고 있다. LA 한인타운 한 중심인 윌셔가에 자리잡고 있는 LA기쁨의교회(담임 이희문 목사)가 지난 10월 18일(토)과 19일(주일) 양일...

일자: 2014.10.21 / 조회수: 0

JAMA 대표에 강순영 목사 취임

JAMA 제2대 대표에 강순영 목사 취임 "이사장에 김춘근 교수" ▲ 자마사역 제2대 대표 이취임식 후 참석자들이 함께 모여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강순영 목사가 10월17일(금) 오전 10시30분 플러톤에 위치한 은혜한인교회(담임 한기홍 목사)에서 JAMA(Jesus Awakening Movement for...

일자: 2014.10.21 / 조회수: 0

2014 베틀린 성시화 선언문 발표

2014 베틀린 성시화 선언문 발표 "한반도 복음적 통일 위해 기도한다" ▲ 세계성시화운동본부 대표들이 성명서를 낭독하고 있다. 지난 6일부터 16일까지 체코 프라하 성시화운동본부 설립대회를 시작으로 '독일 통일의 사례와 통일코리아의 비전'이라는 주제로 열린 2014 베를린 성...

일자: 2014.10.20 / 조회수: 0

기독교인들을 산채로 태워죽인 무슬림들의 잔혹함

기독교인들을 산채로 태워죽인 무슬림들의 잔혹함 "무슬림은 사탄이 만든 종교임을 알자" ▲ 나이지리아의 수니파 무슬림들이 그리스도인들을 산채로 불에 태워서 죽인 참혹한 현장... 기독인들을 산채로 불로 태워 죽이는 생각들은 지옥에서 오는 생각들을 인간의 생각에 불어넣어 ...

일자: 2014.10.20 / 조회수: 0

성인 분노 조절 세미나 - LA 한인가정상담소

제4회 성인 분노 조절 프로그램 "내안의 화, 쿨하게 조절하기" 세미나 안내 ▲ 박해영 카운슬러(우)와 조나단 강 임상심리상담 디렉터(좌)가 성인 분노 조절 프로그램에 관새 설명하고 있다. LA 한인가정상담소(소장 카니 정 조)는 10월 25일(토) 오전 9시에서 12시까지 "성인 분노 ...

일자: 2014.10.20 / 조회수: 0

나성영락교회 한마음 나눔잔치

제8회 나성영락교회 한마음 나눔잔치 "나눔, 베품, 훈훈한 사랑이야기" ▲ 나성영락교회 한마음 나눔잔치에서 담임 김경진 목사가 식사도중 밝은 모습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나성영락교회(담임 김경진 목사)는 제8회를 맞은 '한마음 나눔잔치'를 '나눔, 베품, 훈훈한 사랑이야기...

일자: 2014.10.17 / 조회수: 0

멕시코 대학생 43명 실종관련 LA 서도 시위 동참

멕시코 대학생 43명 실종관련 LA 서도 시위 동참 "LA 맥아터공원에서 거리 시위 주도" ▲ LA 한인타운 인근 멕아더공원과 6가 선상에서 멕시코 청년들이 국기를 흔들며 교육대 학생 43명의 실종 사건에 대한 시위 차원으로 민속춤을 추며 멕시코 정부에 호소하고 있다. 지난달 말 멕...

일자: 2014.10.14 / 조회수: 0

소망소사이어티 1일 소망여행

소망소사이어티 1일 소망여행 독거노인 50여명, 샌디에고에서 즐거운 시간 가져 ▲ LA 소망소사이어티 주최 1일소망여행 중 한자리에 모여 기념촬영. 어려운 살림 속에서도 마음의 여유를 갖고 소망 소사이어티에 도움을 주고 있는 회원들과 다른 단체를 통해 신청한 독거노인들 50...

일자: 2014.10.11 / 조회수: 0

2014 밀알의 밤 - Open Your Eyes

2014 밀알의 밤 - Open Your Eyes 장애인장학복지기금 마련을 위한 "2014 밀알의 밤"이 "Open Your Eyes"라는 제목으로 10월17일 (ANC온누리교회, www.anconnuri.com), 18일 (주님의영광교회, www.gcjc.org), 19일 (베델한인교회, www.bkc.org)에서 열린다. 이번 17회 행사로 열리...

일자: 2014.10.11 / 조회수: 0

윤항기 목사 CCM 신곡 '걱정을 말아요' 발표

윤항기 목사 CCM신곡 '걱정을 말아요' 발표 데뷔 55주년 기념 쇼케이스 ▲찬양하는 가수 윤항기 목사 자신을 목사라고 소개한 55년차 스타의 목소리는 힘이 넘쳤다. 무대에 조명이 켜지자 신나는 드럼과기타, 키보드 소리가 강당에 울려 퍼졌다. 노래를 신명나게 부른 뒤 두 손으로 ...

일자: 2014.10.08 / 조회수: 0

북한의 도발로 무너진 해병대 연평교회 다시 봉헌

북한의 도발로 무너진‘해병대 연평교회’다시 봉헌 군복음화를 위해 앞장서 온 광림교회가 지난 9월 29일 <해병대 연평교회>를 건축하고 하나님께 봉헌예배를 드렸다. 광림교인들의 전폭적인 후원과 기도를 통해 4개월간의 공사기간을 거쳐 완공된‘해병대 연평교회’는 146평규모로 ...

일자: 2014.10.08 / 조회수: 0

2014 CTS 성가합창제(연세중앙교회)개최

2014 CTS 성가합창제(연세중앙교회)개최 연합 합창제로 그리스도의 사랑 널리 전해 순수복음방송 CTS기독교TV(회장 감경철 '이하 CTS’)는 지난 9월 27일 연세중앙교회(담임목사 윤석전) 예루살렘대성전에서 ‘2014 CTS 성가합창제’를 개최했다. 이날 합창제에서는 △ 주안장로교회 ...

일자: 2014.09.30 / 조회수: 0

예장총회, 창립총회열고 총회장 홍재철 목사 추대

예장총회, 창립총회열고 총회장 홍재철 목사 추대 예장총회와 개혁총회 양 교단의 통합제안에 총대들의 박수를 받다. 암으로 투병생활에 고통 중에 있는 박윤식 목사를 위해 통성기도를 ▲예장총회, 99회기 총회 개회예배를 드리고 있다. 『더 나은 미래를 향하여』라는 주제로 한기...

일자: 2014.09.30 / 조회수: 0

마커스 임선호의 키타 클리닉 미주투어 시작

마커스 임선호의 기타 클리닉 미주투어 시작 "1부: 작곡 편곡과 예배 마인드, 2부: 예배자를 위한 기타 클리닉" ▲ 찬양 문화사역 기획사인 원하트 주최로 열린 마커스 임선호의 기타 클리닉에서 기타 연주법을 설명하고 있는 임선호 찬양사역자. 지난 27일(토) 오전 10시 예배자의 ...

일자: 2014.09.29 / 조회수: 0

PCUSA 태평양노회 및 지역폭력방지 세미나

PCUSA 태평양노회 및 지역폭력방지 세미나 "폭력 문화에 화해와 평화의 손길을..." ▲ 노회장 수 피셔 목사가 노회순서를 진행하고 있다. 지난 9월 26-27일까지 로스엔젤레스의 낙스장로교회(담임 Rev. Reginald Ragland)에서 미국장로교(PCUSA) 소속의 태평양노회 정기노회 및 "하...

일자: 2014.09.29 / 조회수: 0

총신대신대원 여학생 입학금지 결정에 대한 여동문회 입장

총신대신대원 여학생 입학금지 결저에 대한 여동문회 입장 총신대신대원 여학생 입학 금지 결정에 대해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과 총회 신학원을 졸업한 총신대신대원여동문회는 지난 9월 18일 가결된“총신대학 신학대학원 입학관련 헌의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입장을 발표했다. 1....

일자: 2014.09.25 / 조회수: 0

제31회 남가주 청년연합 HYM 집회 대성황

제31회 남가주 청년연합 HYM 컨퍼런스 대성황 김승욱 목사 - "Man of Integrity" 청년들이여! 예수님 사랑으로 다시 일러나라! ▲ 분당 할렐루야교회 담임 김승욱 목사와 함께 한 남가주 청년연합 HYM 멤버들. 남가주 청년사역을 대표로 하는 청년연합 HYM (대표 더글러스 김) 컨퍼...

일자: 2014.09.24 / 조회수: 0